- 은희경 장편소설
-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 문학동네 출판
= 1995년

뜬금없이 오래된 소설상 수상작을 읽게된 이유는
날씨가 너무도 더워서 도서관으로 피서(?)를 간 때문이다.
이 책 저 책 그동안 읽고 싶었던 도서들을 검색 하다가 한 권을 빼들고 의자에 앉아 읽고 있었다.
문득 눈을 드니, 바로 앞 책장에 <빨간책>이 꽂혀있고, 빨간책?이 궁금하여 읽다보니
그 책에서 이 책을 소개하고 있었다.
(왜 이 책을 소개했는지는 잊었는데) 갑자기 이 책이 궁금해졌다. 검색해보니
마침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길래. 읽게된 소설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흠인력이 대단했다.
1960년대 말, 그러니까 1969년이 이 소설의 배경인데,
1990년대에 서른이 훌쩍 넘은 내가, 1969년 열두살 소녀 였을 당시 할머니 집(감나무집)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집에 묵었던 여러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었다.
열두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당돌하고, 빨리 성숙해버린.
이 안의 나의 말대로 하면 "난 열두살이후로 성장을 멈추었다'고 하니, 열두살에 인생의 모든 인간사를 두리 깨우쳐 버렸다고나 할까.
열두살이 하는 사고라기에는 너무도 성숙되어져 불편한 감이 있긴하지만.
뭐, 지금의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네 열두살 때의 경험을 회고하고 있으니,
지금의 시점에서 그 때를 분석하고 있다고 본다면 그리 당혹스럽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국민교육헌장, 박정희, 신성일과 신형균, 그리고 문희가 나오는 영화, 문희가 그려진 부채, 혼식검사, 까스명수, 대한뉴스, 주민등록증의 탄생, 등등....
지금의 세대는 전혀 알리 못하는 1969의 시대적 배경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아주 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사랑, 그리고 상실, 아픔들.
세사람의 소설 심사평은 이러하다.
'이 작품에서 두선 돋보이는 대목은 물론 삶의 진실에 던져지는 날카롭고 에누리 없는 시선이다.'(김화영)
' 작가의 탁월한 역량이 유감 없이 발휘되는 대목은 군더더기 없고 원숙한 묘사능력 쪽이다."(김화영)
"결코 크거나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과 행태가 적나라하게,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당돌하고 영악한 화자의 시선은 우리가 믿고 좇는 규범과 상식과 미망의 '허'를 여지없이 찌른다. 그러나 당연히 누려야할 것들을 일찍이 박탈당한 소녀가 본능적으로 터득한 자기방어 수단인 위악과 냉소의 시선 뒤에는 따뜻한 애정과 슬픔이 있기에, 절망은 희망으로 씁쓸함은 풍요로움으로 재반은 신뢰로 바꾸어 읽힐 수 있는 것이리라" (오정희)
" 다름 무엇보다도 개개의 등장안물들이 저마다 독특한 개성으로 생생히 살아 있게끔 형상화에 성공함" (윤흥길)
---------------------------------------
<책속으로>
- 내 정통성이 뿌리를 내린 곳은 할머니의 사랑이 아닌 책임감이나 의무 따위의, 그러니까 사람보다 훨씬 저급한 감정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하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저응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기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진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p.123)
-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능력을 상실하는 거였다. 나는 내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의 의도대로 반응하면서 살고 싶진 않았다. (p.130)
- 삶의 이면을 많이 알다보면 매사에 의심이 많아지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이해심이 많아지는 면도 있는 것이다.(p.171)
(이 말은 허석이 변소에서 나오며 흐트러진 차림새를 보고도 허석의 이미지가 전혀 훼손되지 않는 것에 대해 작중의 내가 한 말이다.- 너무 우습지 않은가? 귀엽기까지 하다)
- 슬픔, 그렇다 내 마음속에 들어차고 있는 것은 명백한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극기훈련이 시작된다. '바라보는 나'는 일부러 슬픔을 느끼는 나를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찬물을 조금식 끼얹다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된다.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다. 슬픔을 느끼자, 그리고 그것을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자.(p.187)
- 불안 때문이었을까. 아줌마처럼 강인한 사람은 아무리 힘든 삶이라도 자기가 익히 아는 일은 어떻게든 이겨나갈 자신이 있다. 그러나 새롭게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불안하고 자신이 없다. 그것이 아줌마처럼 자기 생에 대한 의지는 강화되 가지 생을 분석할 줄 모르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p.241)
- 새 삶에 대한 아줌마의 용기는 풍화작용으로 이미 모서리가 다 깍여서 자갈돌처럼 하찮게 발밑을 굴러다니고 있었다.(p.242)
- 모든 중요한 일의 결정적인 해결은 꼭 우연이 해준다. 복잡한 계산과 치밀한 논리를 다 동원하고도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을 때 우연은 그 어렵고도 중요한 일을 어이없을 만큼 가볍게 해결해버린다. (p.294)
- 이모는 이형렬이 자기의 영원하고도 유일한 사랑이라는 지극히 서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받게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이모처럼 감상적인 사람은 삶을 너무 낙천적으로 생각한다. 아니 삶이 자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햅지 않는다. 자기의 행복과 불행의 조종간을 통째로 타인의 손에 쥐어준다면 그 타인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잠시일 뿐이다.(p.304)
- 사랑이 여전히 배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나를 안심시킨다. 만약 사랑이 무겁고 엄숙한 것이었다면 나는 열두 살 그 때처럼 상처의 내압을 견디기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하긴 사랑이나 존재라는 말 못지않게 배신이란 말의 뜻도 가볍다. (...)그러므로 누구 누구를 배신한 것이며 누구의 배신이 더 심각한가 따위, 배신의 진앙과 진도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런 것을 따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 의도하진 않았다 할지라도 누군가를 배신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마치 서로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심상하게 얽혀 짜여져 있지만 이 삶 속에서 누군가의 적이 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삶 속에는 타의가 있는 법이니까. (p.385)
- 90년대가 되었어도 세상은 내가 열두 살이었던 60년대와 똑같이 흘러간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p.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