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 지성사 출판
- 2022년판 (2009 번역본)

- 사회적이고 가족적인 경험의 프러스코화인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극단까지 밀어붙인자기 분석이다. 저자는 문학과 마르크스주의의 별견에 매료당한 뒤, 이상적 프롤레타리아에 부합하지 않는 교양 없는 부모를 원망하며 다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 자신을 '거의 완전히 재교육'하는 밎중 계급 출신 모법생의 궤적을 기술하고 객관화한다. (아니 에르노)
- 에리봉은 자신의 분석을 명확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기 위해 부르디외, 바르트, 푸코, 사르트르 및 다른 이론가들에 대한 깊은 지식을 이용한다. 하지만 이 책이 지닌 놀라운 힘의 중싱에 있는 것은, 계급적, 성적 수치심이 사회적 지배 체계의 유지에 끊임없는 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을 폭로하기 위해 에리봉이 자신의 삶을 이용하면서 보여주는 불굴의 정직성과 비상한 통찰력이다. (조지 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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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름다운 책이다.
에리봉의 통찰력과 자기 고백은 너무도 날카로워서 마음을 찌른다.
'계급적 재생상- 비생산 '된 모든 민중계급의 '부끄러움'과
'소외된 소수자'
그리고 '성적 수치침'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그것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만들어진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구별짓기에
다름아님을 보여준다.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에리봉은 소수자가 스스로를 (재)발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회질서가 만든 자신의 현재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비천한 소수자’라는 존재는 자기 변환의 재료인 동시에 작동인이 된다. 사회질서가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순간, 소수자에게는 모욕과 낙인을 계속해서 감수하지 않고 세계에 맞설 가능성이 열린다. 소수자가 사회적으로 생산된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고 의미 부여하는 순간, 정체성은 이제 더 이상 동일하게 유지되지 않고 새롭게 변모하며, 다시 그것을 둘러싼 세계를 변화시킨다.(pp.316~317)"
우리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지배질서에 의해 모욕과 불명예를 수반하는 열등성의 범주 안에 기입되고 비체화되는 사회학적 문제"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통해 '성찰을 통한 자기 부정'을 가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수립해나가는 힘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기위해서
에리몽은 지적 포퓰리즘에 맞서 ‘인식론적 단절’, 혹은 이른바 ‘내려다보는(조망하는) 시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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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1부
이 세계들을 분리하는 경계선들은 각 세계의 내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또 없는지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상상하고 지각하도록 규정한다.(p.55)
이론의 힘과 매력은 ‘행위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개인과 집단 들이 그들의 존재와 행위를 다른 식으로 보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려는 목표를 선정하는 것에서 나온다. 문제는 체화된 지각 범주 및 제도하된 의미 틀과 단절하고 그것들이 백터로 작용하는 사회적 관성과 단절하는 것이다. 그러한 후에댜 우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발명해내고, 나아가 새로운 정치적 관점을 열 수 있다.(p.56)
2부
나는 분열되어 편치않았다. 내가 끼어들어가 살아가는 부르주아 세계에서 내 신념은 불안정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내가 내세우는 사회 비판은 재게 부과된 가치들과 마찰을 빚었다. “본의 아니게”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무엇도 내개 그것을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의 지각과 판단에 내가 자발적으로 복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정치적으로는 노동자들의 편이었지만 내가 일정 부분 그들 세계에 뿌리내릭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민중이 내 가족이 아니었더라면, 그러니까 좋ㄷㄴ 싫든 간에 그들이 내 과거이자 현재가 아니었더라면, ‘민중’ 진영에 나를 위치시키는 일은 내게 내면의 고민과 정신적인 위기를 덜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pp.80~81)
사회적 족내혼(族內婚)의 법칙은 교육적 재생산의 법칙 못지않게 강력하다. (p.88)
자기 귀속과 변형 과정, 정체성의 구성과 거부 과정은 내 안에서 언제나 서로 연계되어 있었고, 뒤얽혀 있었으며, 서로 맞서 싸우며 제약하는 것이었다, 원초적인 내 사회적 정체화(identification)(자기를 자기로서 인지하기)는 거부된 정체성에서 끊임없이 힘을 얻는 탈동일시에 의해 교란당했다.(p.109)
나는 내 글쓰기 방식이 사회적으로 위치 지어진 외부성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중략) 우리는 노동자층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에 관해 말을 할 때는 대개 우리가 그로부터 빠져나왔기 때문이며, 그리서 행복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에 관해 말하기를 원하는 순간, 우리가 말하는 대상인 그들의 사회적 정당성 박탈 상태를 다시 공고히 하게 된다. 그들에게 지칠 줄 모르고 덧씌워지는 그러한 위사을 고발하기 위해 말하는 것임에도 말이다.(p.110)
예술에 대한 취향은 학습되는 것이다. 나는 배워서 얻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세계, 다른 사회 계급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내 출신 계급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수행해야 했던, 나 자신에 대한 거의 완전한 재교육의 일부였다.
예술적문화적 대상에대한 흥미는 언제나,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이에 접근 기회가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고, 자기-구성적인 간격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구별짓기’를 함으로써, 타인들-‘열등한’‘교양 없는’계급-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스스로를 가치 있게 정의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p.120)
나는 학교 체계가 우리 눈앞에서 작동하는 모습 속에서 진정 사악한 기계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민중 계급의 아이들을 배척하고, 계급적 우위 및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차별적인 접근 기회를 영속화하고 정당화하는 것, 그 기계는 설령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이러한 결과에 다다른다. (...) 그 질서는 은밀한 동시에 모두가 볼 수 있게 작동하며, 모든 것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것에 맞서서 부과된다.(pp. 138~139)
3부
존엄성은 그 자체 취약하고 불확실한 감정이다. 그것은 신호와 보증을 필요로 한다. (p.151)
그 때의 일을 다시 돌이켜보면, 다으모가 같이 자문하게 된다. 어머니의 인종주의와 어머니(이민자의 딸!)가 이주 노동자들 일반과 특히 ‘아랍인들’에 대해 공공연히 드러내는 지독한 경멸은 혹시, 열등하다는 낙인이 찍힌 사회적 범주에 속하는 어머니가 자기보다 더 심하게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 하나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p.167)
인종주의적 분할이 계급적 분할을 대신하게끔 만드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결집의 부재, 또는 결집연대하는 사회집단에 속해 있다는 자의식의 광범한 부재이다. 좌파가 자의식의 지평이 되어주었던 결집을 파기해버리자, 이번에는 집단이 다른 원리, 즉 민족적 원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빼앗기고 추방당했다고 느끼는 영토의 ‘정당한’점유자로서의 자기 확신으로, 이제 그들이 사는 동네가 작업장과 사회적 조건을 대체해, 그들 자신을 규정하고 그들이 타자와 맺는 관계를 규정한다. 또한 그들의 자기 확인은 더 일반적으로 국가의 당연한 주인이자 소유자로서, 국가가 시민에게 부여하는 권리들에 대해 배타적인 수혜를 주장한다. ‘타자들’이 이 권리들-실제로는 거의 갖고 있지 않은데-을 통해 혜택을 본다는 생각은, 그것들을 나눠 가져야만 하고 그리하여 각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줄어드는 것처럼 비칠수록,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p.168)
좌파가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며 욕망과 에너지가 투자되는 공간 내지 용광로로서 조직되기엔 무력한 실상을 드러낼 때, 우파나 극우가 그러한 문제 제기, 욕망, 에너지를 유인하고 수용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과제가 사회운동과 비판적 지식인에게 주어진다. 사회체 내에서, 특히 민중 계급내에서 작동하는 부정적인 열정을 없애지는 못핳지라도-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최대한 중화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지각 양식가 이론적 틀을 구축하기, 다른 관점들을 제공하고, 다시 한 번 새롭게 좌파라고 불릴 만한 미래를 스케치하기(p.175)
4부
(민중계급 출신의 학생들은) 교육 체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장치를 통해 내리는 사회적 명령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상 내게는 두 갈래의 길이펼쳐졌다. 하나의 길은 딱히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집스럽게 말을 듣지 않는 태도, 부적응, 오만불손, 반감과 냉소, 완강하 ㄴ거부 등으로 표현되는 자발적인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전의 수많은 아이들이 그랬듯, 나 역시 이 체계에서 소리 소문 없이 추방당하면서 마무리될 터였다.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힘 때문이지만, 마치 내 개인적 행동의 단순한 결과하는 모양새를 띠고서 말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학교의 요구에 맞춰 점차 나를 굽히는 것, 학교에 날 적응시키는 것, 학교의 주문을 수용하는 것, 그리하여 학교의 벽 안쪽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저항은 나를 잃는 길이었고, 복종은 나를 구하는 길이었다.(pp.189~190)
빈곤층은 이전에는 배제되었던 것들에 비로소 접근할 수 이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실상은 다르다. 그들이 어느 위치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위치가 체계의 이전 단계에서 갖고 있던 위상과 가치를 상실한 뒤다. 유배는 더 느리게 이루어지고 배제는 더 나중에 일어나겠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차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을 자리를 옮겨가며 재생산된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구조의 평행이도”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 그 변화의 외양 바깥에서, 경직된 구조는 전과 다름없이 유지, 영속되며 평행이동한다.(p.204)
학위는 우리가 사회관계자본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또 졸업장을 전문직으로 다시 전환하는 전략에 필요한 정보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다른 가치와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족과 친지의 도움이나 친분 관계, 인적 네트워크 등이 모두 노동시장에서 학위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데 이바지 한다. (pp.220~221)
5부
정통과 그것의 반복을 의문에 부치는 이단적 활동의 효과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전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방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을 전복한다고 해도 그것은 특정한 시점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는 살짝 이동하고 옆으로 한 보 옮겨 편차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푸코식 용어로 말해, 물가능한 ‘해방’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기껏해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제도화되어 우리 존재에 속박을 가하는 몇몇 경계를 돌파할 수 있을 뿐이다.(p.258)
에필로그
지적 삶도 가까이서 보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현실은 우리가 거기 끼어들기를 열망할 때 지니는 이상화된 비전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p.266)
우리는 바로 동시대 정치학에서 출발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지배와 예속화의 메커니즘이 실행된 방식과 저항 과정을 통해 생산된 자기가 재표명된 방식을 성찰한다.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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