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단편집
- 황병하 옮김
- 민음사 출판
- 2002년판
(현재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로 송병선 번역으로 들어있다.)

아르헨티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 1941년에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에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17편의 단편을 모은 책이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움베르트 에코 등 현대 지성사의 핵심적인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보르헤스의 세계관과 미학을 드러낸 대표작이다. 또한 일생 동안 장편소설을 한 편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엿볼 수 있다. 허구를 주제로 한 단편들은 가상과 실재, 기억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경하고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출판사 책소개에서)--------------------
이 책에 들어 있는 단편 '바빌로니아의 복권'을 읽고,
마지막에 옮긴이의 주석에서 " <회사>를 '알모따심'으로 규정했다"는 부분이 맘에 들지 않아
AI에게 질문을 했다. "왜 보르헷는 "회사"를 '알모따심을 '으로 국한했지?"라고 물어보았다.
답변은 '회사를 알모따심에 비유한 것은 단순히 풍가자 아니라 그의 철학적 세계관이 반영된 장치라고 보는 것이 좋아요'라는 답변을 준다.
"핵심은 알모따심이라는 존제 자체가 실체라기 보다, 점점 다가가지만 끝내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중심이라는 점"이며 '알모따심은 '작품에 직접 등장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빛'이나 '흔적'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회사=그 중심을 흉내 내는 구조'로 '회사도 중심(권력)이 있고, 구성원들은 그 중심의 의도를 완전히 알지 못하지만 그 중심의 '기운'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지한 찬양이 아니라 '아이러니'인데, '우리가 절대적 의미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구조적 환상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그래서 보르헤스는 우리에게 묻는다.
" 우리가 따르는 중심은 정말 실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허상인가?'를.
이러한 사상은 플라톤의 철학을 근본으로 깔고 있는 것같다.
보르헤스의 책은 어렵다.
너무도 철학적이고 충자적이며, 모호한 은유로 가득차서 그 밑에 깔린 이면을 충분히 파악하기에는 너무도 어렵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일곱 개의 단편들은 특별한 주석을 요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역자는 끝없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왜? 그의 글이 너무도 어렵고, 다양하고, 풍부한 지식과 철학적 믿바탕, 그리고 어떤 책에 대한 리뷰 형식으로 쓰여져 있어서이다.
그런 형식을 빌려온 이유는 ' 허구를 사실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한' 장치이며,
그걸 이용하면 실제로는 없는 소설을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르헤스는 이야기 줄거리 자체 보다는 '독자들이 소설이나 문학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더 큰 초점을 맞추도록 한 것 같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나간 짓이다. 단 몇 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생각을 30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리는 짓, 보다 나은 방법은 이미 그러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하나의 코멘트, 즉 그것들의 요약을 제시하는 척하는 것이다."라고.
그래서 우린 이 책을 읽으며 하나늬 문학작품이나 이야기 라기 보다는 문학비평서 처럼 읽게된다.
문학작품은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는 독자의 시점에서 재 해석되며,
역사 또한 사실 속에서 역사가에 의해 선택되어지고, 왜곡되기도 한다. (시각에 따라)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나, 문학작품은 그 것을 읽는 독자의 시대적 배경과, 환경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르며
전 시대에 쓰여진 글이 역자에 의해 같은 글귀도 다른 문체로 번역되어지며, 또한 역자의 감수성과 해석에 따라 달리 쓰여지기도 한다.
보르헤르가 이야기 하고 싶은 이런 내용(이것도 나의 시점이다)을 쉽게 쓰면 될 것을.
하긴. 그러면 문학적이니 않겠군. ㅜ 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문학이라는 구조와 틀 속에 교묘히 집어넣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문학이니까.
아무튼 작가 또한 시대적, 환경적, 철학적 배경에 따라 다른 묘사와 글이 나올테니, 어려운 일이다.
그는 <<끝없이 두 갈레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취행이라는 작가를 분석하는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철학적 논쟁은 그의 소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시간이라는 문제만큼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고뇌하도록 만든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간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소설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유일한> 개념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시간>을 뜻하는 유사한 단어조차 쓰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이러한 의도적인 삭제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중략)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느 길들이 있는 정원>은, 그것이 해답이 시간인 하나의 수수께끼, 또는 우화인 거지요. 바로 그러한 깊은 이유 때문에 그는 그 단어를 언급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단어를 강조하기 위한 가장 뛰어난 방법은 그것을 <영원히> 생략해 버리거나, 췌사적인 은유, 또는 뻔히 드러나는 우회적인 언어에 호소하는 방법일 것ㅂ니다. 그것이 바로 완곡한 성격을 가진 취팽이 자신의 끝없는 소설 행간 행간에서 선호했던 고통스러운 작업 방식이었던 거지요.
그는 시간의 무한한 연속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럽게 증식되는, 분산되고 수렴되고 평형을 이루는 시간들의 그물을 믿으셨던 거지요, 서로 접근하기도 하고, 서로 갈라지기도 하고, 서로 단절되기도 하고, 또는 수백 년 동안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기도 하는 시간의 구조는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게 되지요, 우리는 이 시간의 일부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어떤 시간 속에서 당신은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시간 속에서 나는 존재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간의 경우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 화의적인 우연이 내게 부여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당신은 나의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 그러니까 정원을 가로지르던 당신은 죽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또 다른 시간에 나는 지금과 같은 똑같은 말을 하지만, 나는 하나의 실수이고, 유령일 겁니다.(pp.164-165)
어쩌면 작가가 자신의 글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작가의 시점으로 생각해보면,
현재라는 시점에서 우린 그가 들려주는 '픽션'을 듣고 있고,
또 다른 시점에서는 현실 속에서는 다른 생각과 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또한 허상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고, 우린 그 실체가 반사한 빛만 바라보고 있을 뿐일 수도 있으니.
보르헤르의 표현대로, 한바탕의 꿈이고, 결국 다다를 수 없는 저 너머일수도.
'참으로 세상에는 어찌 이리 뛰어난 사람들이 많은지?'
책을 읽으며 드는 감탄이다.
책을 읽고 있는데
문장 가운데서 작가가 갑자기 나에게 묻는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나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 (p.142. '바벨도서관 '중에서)
깜짝 놀라면서 뜨끔하다. 정말 이해하고 있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