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라 쿤데라 장편소설
- 이재룡 옮김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자신을 운명이라고 믿는 여자를 부담스러워하며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토마시, 그를 끝까지 믿는 여자 테레자. 자유로운 영혼의 토마시의 연인 사비나, 자유로운 사비나에게 매료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안정된 일상을 누리던 프란츠.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를 방황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육체와 영혼, 삶의 의미와 무의미, 시간의 직선적 진행과 윤회적 반복의 의미,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등 다양한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소설이 펼쳐진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람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p.9. 소설의 첫구절)"
로 시작되는 이 책은 우리 삶의 무거움 만큼 우리에게 무거움을 강요한다.
삶이 무거운 여자 '테레자'와 삶의 가벼움이 버겨운 남자 '토마시'가 주인공이다.
아주 오래전에 영화를 받을 때는 어떤 장면으로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을 다시 읽으며 영화로 만든다면 난 사비나라 미국에서 두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고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할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영화가 어떻게 저자의 철학적 삶의 고찰을 영상화 하겠는가? 어려운 일이다.)
책은 '테레자와 토마시,' 그리고 '사비나와 프란츠', 이렇게 4명을 주요 인물로 다루고 있다.
상반된 4명이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각자 나름의 이유로 삶이 무겁고, 각자의 이유로 삶의 양태를 선택한다.
난 어디에 해당할까? 아마도 삶이 무거운 쪽에 해당할 거다.
니체가 말한 영원이 같은 삶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이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인 삶 자체도 너무도 무거우므로.
우린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당한다. '그 때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삶이 달라졌을까?'
단 한번의 삶이기에 연습이 없으므로, 한 번의 선택은 늘 무겁다.
육체의 외피로 살아가기에도 벅차서 그 곳에 들어있는 영혼도 외면하고,
'불가능성의 무거움'이 '가능성의 가벼움'으로 바뀜을 사비나처럼 원하는 지도 모른다.
우린 사회적 동물이기에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사회가 가진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고,
정치와 역사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은 삶이 필연성에 의해 가볍게,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원하지만
환경은 그 가벼움을 참을 수 없도록 만든다.
젊었을 때 이 책을 읽고 '이해받지 못하는 말들'에 대해 깊이 공감한 기억이 난다.
같은 단어를 말하나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아주 다른 의미로 들리는 언어의 공허성.
서로 이해받지 못하는 말들.
이러한 '이해되지 않음' 혹은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성향차이와 삶의 방식 차이에서 오는 영원한 평행선이다.
그래서 우린 타인을 나와 같은 방식으로 변화시키려하거나,
기대를 가지면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참으로 대단한 문장력이라 많은 부분에 생각이 머물고,
밑줄을 긋고 했지만.
여기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여긴 개념은 '키치'라는 개념이다.
전체주의에서의 키치,
현 사회속에서 우리가 가진 '키치'들.
위험하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받아들여야한 속하게 되는 키치들.
할말은 아주 많지만 <책속으로 > 밑줄 그은 말 들 중 가장 인상깊었던 글 귀를 적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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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 (“es muss sein!”)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p.60)
-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p.87)
-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p.88)
-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p.92)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p.92)
-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원하는 자는 어느 날엔가 느낄 현기증을 감수해야만 한다.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갗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p.106)
-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 동료와 친구, 어릴 적부터 알아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나라, 즉 조국이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p.132)
-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말의 논리적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했으나 이 말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p.151)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브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p.152)
-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p.156)
- 그러나 B를 위해 A를 배신한다 해서 이 배신이 A와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혼한 여자 예술가의 삶은 배신당한 그녀 부모의 삶과는 닮지 않았다. 첫 번째 배신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배신은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들을 야기하며, 그 하나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먼 곳으로 이끌기 마련이다. (p.157. 정조와 배신)
-그날 이후 그녀는 아름다움이란 배반당한 세계하는 것을 알았다. 그 아름다움이란 박해자들이 실수로 어딘가에서 그것을 잃어벼렸을 때만 만날 수 있다. 아름다움은 노동절 행렬 배경 뒤편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배경이 그려진 화폭을 찢어야만 한다. (p.184. 오래된 암스테르담의 교회)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p.201)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고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p.321)
-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p.337)
-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p.357)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p.358)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키치는 유별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한다.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p.404)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p.405)
키치는 모든 정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예기치 않은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내가 전체주의라고 표현한 까닭은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주의의 발현(모든 부조화는 미소 짓는 연대감의 얼굴에 내뱉은 가래침이기 때문이다. 모든 회의주의.(사소한 세목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는 자는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삶, 그 자체를 의심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키치의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진지하게 간주외어야 하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가족을 버린 어머니나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해서 ‘교미하여 번식하여라.”라는 신성불가침한 슬로건을 위협하는 남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위 강제수용소는 전체주의적인 키치가 자신의 오물을 버리는 정화조라고 할 수 있다.(pp.406~407)
테레자의 꿈은 키치의 진정한 기능을 고발한다. 키치는 죽음을 은폐하는 병풍이다.(p.410)
전제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찍는 칼과 같은 것이다. (...)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소위 전체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사람은 질문과 의심을 가지고 투쟁할 수 없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만 하고 집단적인 눈물샘을 자극해야만 하는 확신과 단순화된 진리가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p.411)
키치의 원천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다.(p.416)
정치 운동은 합리적 태도에 근거하지 않고 표상, 이미지, 단어, 원형들에 근거하며 이런 것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정치적 키치를 형성한다.(p.417)치인, 모든 정치 행위의 미학적 이상이다.
-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p.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