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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친구삼아

농담

by 비아(非我) 2026. 6. 7.

- 밀란 쿤데라

- 방미경 옮김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농담』은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문제작가 밀란 쿤데라의 첫 작품이다. 밀란 쿤데라가 유일하게 정본으로 인정하고 있는 프랑스의 갈리마르 판을 원본으로 삼아 가톨릭대 방미경 교수가 번역했으며, 소설 속 화자들의 어조까지 세심하게, 쿤데라 특유의 어조와 문체를 살려내었다.
쿤데라는 1961년경 체코에서 『농담』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965년 12월 탈고했다. 『농담』의 초고는 약 1년간 검열에 걸려 있다가 출판이 허가되어 1967년에 처음 출판된 후로 두 번 더 출판되었고, 1968년 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동맹 상’을 받았다. 친구인 감독 이슈마르 이레슈가 『농담』을 영화화할 때 쿤데라는 시나리오의 각색을 맡았었다. 그러나 이후 이 소설은 쿤데라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주도한 혐의로 교수직에서 해직된 후 쿤데라의 다른 소설들과 함께 발매 금지가 되었고 체코 내의 모든 공공도서관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때 이후 체코어로 다시 출판된 것은 1989년에 와서이다.
프랑스어 판으로 『농담』이 처음 출간될 때(1968년) 루이 아라공이 훌륭한 서문을 썼고, 이후 세계의 모든 비공산 국가에 출판된다. 그러나 여러 번역 판본들은 오역과 함께 구문의 삭제 등을 겪고 있었고 1979년 프랑스어 판본을 읽어본 쿤데라는 작가인 클로드 쿠르트와 함께 『농담』의 번역을 정정한다. 그 후로도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1985년 『농담』의 결정판이 갈리마르 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후 쿤데라는 약 2년간 다른 장편소설들의 번역 수정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오늘날 갈리마르 사에서 나온 쿤데라의 책은 쿤데라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는 권위적인 모델이 되었다.

『농담』은 쿤데라 문학의 사상적 근원을 보여 주는 그의 대표작이다. 남녀간의 사랑과 정치적 비판을 함께 미학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추구한다. 이 소설에서 쿤데라는 사랑, 우정, 증오, 복수 등 사소한 사적인 삶에서 시작하여, 선의로 출발한 이념일지라도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암시하여 절대 신념과 획일주의를 경고한다. 절대 신념이 인간 개인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농담』은 독특한 서술 방식을 지니고 있다. 루드빅은 1·3·5·7부의 화자로서 중심인물이며 헬레나는 2·7부, 야로슬라브는 4·7부, 코스트카는 6부의 서술을 맡는데 특히 7부는 영화의 화면이 바뀌듯 세 인물의 서술이 교차된다. 각각의 인물들의 독백이 독자의 눈을 통해 맞춰지면서 각 인물들의 삶이 전체적으로 조명되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자기반성의 시대인 요즈음 『농담』은 자유를 그리워하는 한 지성인이 자신을 둘러싼 역사와 정치 상황을 향해 던지는 물음이면서 동시에 탈이념의 시대라는 현대의 시대 정신의 구현으로 다가온다.

 

---------------(출판사 책소개에서)----------------------------------------

 

- 인간은 살아가면서 몇 개의 가면을 가지고 살아갈까? 그 속에 진정한 나의 모습이 있기는 한가?

"아니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 나는 위선자들처럼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p.49)"

 

-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던진 농담이 나의 모든 삶을 결정하게 된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내가 젊었을 때, 한 때의 치기로 저지른 실수가 평생을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한다면, 나는 복수를 꿈꾸게 될까? 그러나 복수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그 범위는?

"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그러나 이 증오를 순수히 추상적인 원리들, 불의, 광신, 야만성에 집중시켜 보라! 아니면 당신이 인간의 원리 자체마저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인류 전체를 한번 증오해 보라! 이런 증오는 너무나 초인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인간은 이 분노의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가라앉히고자 할 때 결국 분노를 한 개인에게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나의 공포는 거기에서 온다.(p.373. 루드빅)"

"정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 한심한 사건을, 그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다른 것으로 괴물처럼 증식해 가는 그 고약한 농담을, 말끔히 치워버려야만 했다. (p.390. 루드빅)"

"과거에 최면이 걸린 나는 어떤 끈으로 거기에 자신을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복수하는 끈. 그러나 이 복수라는 것은 요 며칠 사이에 내가 확실히 알게 되었듯이, 움직이는 자동 보도 위를 달리는 나의 그 질주만큼이나 똑같이 헛될 뿐이다. 그렇다 내가 제마넥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예전의 얀이 아닌 다른 얀이 역시 예전의 제마넥이 아닌 다른 제마넥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내가 그에게 날려야 하는 따귀는 다시 되살릴 수도 다시 복구할 수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p.396. 루드빅)"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pp.398~399. 루드빅)"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순수한 가치란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는 천상과 지옥 사이의 경계에 있다. 그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서 좋거나 나쁘지 않다. 오로지 어떤 행위가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그 행위를 좋게도 만들고 나쁘게도 만든다.(p.325)"

 

-이념은 얼만큼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일까? 시대의 흐름. 역사 속에서 늘 변천하고 발전하는 것이거늘.

" 나는 그들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그들을 높이 사.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 우리는 무시했잖아. 그들은 여행을 좋아해. 우리는 한곳에 처박혀 있었는데. 그들은 모험을 좋아하지. 우리는 회의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는데 말이야. 그들은 재즈를 좋아해. 우리는 부질없이 민속 음악이나 휴내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골몰해 있지.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고. 우리는 우리의 메시아주의를 가지고 세상을 망가뜨릴 뻔했지. 이제 그들이, 그들의 이지주의를 가지고 이 세상을 구하게 될지도 몰라.” (p.376. 제마넥이 루드빅에게 한 말.)

-내게는 언제나 너무도 현재적이고 생생한 그와 나 사이의 투쟁 위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위무의 물결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시간의 물결. 그것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모든 시대들 사이의 차이들마저 다 씻어가 버리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쉽게 씻어가겠는가.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모든 화해의 기회에 맞서 맹렬하게 저항하였다. (p.378. 루드빅)"

 

-종교가 인간의 삶에 공허를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 될까?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역사의 모순은 신의 뜻일까? 인간의 실수일까?

"1948년 이후 혁명의 시기는 회의주의나 합리주의와 공통적인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위대한 집단적 신념의 시대였지요. 그 믿음을 긍정하며 시대와 더불어 행진하고 있던 사람은 종교가 주는 것과 아주 유사한 느낌들에 언제나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보다 높은 것, 보다 초개인적인 어떤 것을 위하여 자신의 자아, 이익, 사적인 삶을 포기했던 겁니다. 마르크시즘의 테제들은 물론 속세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서 발견된 의미는 복음서와 성서의 가르침의 의미에 비견될 만합니다. 그렇게 해서 침범할 수 없는, 그러니까 우리 용어로 하자면, 신성한, 일련의 이념들이 생겨난 것이죠.

(...) 그 시대는 종교로부터 행동과 감정들을 이어받고 있었지만 그 내면에는 하느님이 없이 공허함만 남아 있었어요.(...) 그 시대는 결국에는 자신의 종교성을 배반하였고, 단지 스스로를 몰랐기 때문에 자신의 근원이라 여긴 그 합리주의의 유산을 위해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수세기 전부터 회의적 합리주의는 기독교를 침식시켜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침식은 시켜도 파괴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이론이 만들어놓은 것, 그것을 몇 십년 안에 모두 백지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루드빅, 당신에게서 회의적 합리주의는 그것을 이미 죽여버리지 않았습니까. 당신도 잘 알고 있지요.(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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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1. 사랑에 빠진다는 것. 

-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심리적, 생리적 구조란 너무도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삶의 어느 시기에 있어서 젊은이는 그것을 통제하는 데에만 거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때가 있고, 그래서 그런 젊은이에게 사랑의 대상 자체, 즉 사랑하는 여인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 (p.49)

- 그날 저녁부터 내 안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내 안에 다시 누군가가 살게 된 것이다. 나의 내면은 마치 방처럼 휙 청소가 되고 어떤 사람이 거기에 살게 되었다. 여러 달 전부터 바늘이 마비된 채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갑자기 다시 똑딱거리기 시작했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나와 아무 상관 없이, ()에서 또 다른 무를 향해, 아무 표지도 측량선도 없이 그저 무심히 흘러가던 시간이 점점 인간화된 얼굴을 다시 지녀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이제 다시 분명한 모습을 띠게 되고 헤아려지기 시작하였다.(p.104)

 

2.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한다는 것.

- 나는 인간의 운명을 심판하는 최고재판소에 비치된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도저히 바로잡아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이미지는 나 자신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실제적이며, 그것은 결고 나의 그림자가 아니라, , 바로 나 자신이 내 이미지의 그림자였다. 왜 나를 닮지 않았냐고 그 이미지를 탓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미지와 다른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리고 이 다름은 바로 나의 십자가, 그 누구에게 떠넘길 수도 없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으로 선고받은 십자가였던 것이다.(pp.76-77)

 

3. 젊음

-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생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다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가지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pp.128~129)

- 그들 또한 무엇보다 우선, 자신들이 가장 탁월하다고 믿는 가면, 즉 금욕적이며 강직한 혁명가의 가면 아래 자신들의 완성되지 않은 얼굴을 감추고 있는 어린아이들이었던 것이다.(p.129)

-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에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을 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읆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이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구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네로라는 풋내기,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 흥분하여 날뛰는 수많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흉내내는 열정이나 간단하게 맡아버린 역할들은 처참하도록 실제적인 현실로 변형되어 나타난다.(p.130)

- 오늘,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이 순간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잘 알 것 같다. 알렉세이는 그 때 겨우 스무 살 청년, 어린아이였음을, 그의 운명은 마치 아주 작은 몸 위에 걸쳐진 거인의 옷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음을.(p.149)

 

4. 일직선인 삶. 그래서 너무도 무거운 가벼움

- - 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민중은 훨씬 정직하다. 그들은 중대한 상활을 맞을 때마다 상황의 가장 깊은 곳으로 노래를 부르며 내려온다. (p.213)

- 나는 원하는 것이 하나밖에 없었다. 즉 이제 다가올 순간들이 오지 않기를, 또는 이런 내 소망이 불가능한 것이라며, 적어도 이 순간들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기를, 아무 무게도 없고, 먼지보다 가벼운 것이 되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 밖에 없었다.(p.282)

 

- 내가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아침, (뜻밖에도) 이 세계를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쓸쓸한 모습으로. 이 세계는 화려한 치장과 광고로부터 버림받았고, 정치적 선전으로부터, 사회적 유토피아들로부터, 문화 담당 공무원 집단으로부터, 사회적 유토피아들로부터, 문화 담당 공무원 집단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이 세계는 내 세대 사람들의 열정에 찬 지지로부터 버림받았고 (또한) 제마넥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이런 고독 속에서 이 세계는 정화되었다. 나에게 꾸짖음으로 가득한 이 고독은 마치 얼마 살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이 세계를 정화시켰다. 그 고독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최후의 아름다움으로 이 세계를 눈부시게 빛나게 하고 있었다. 이 고독이 그 세계를 나에게 되돌려준 것이었다. (p.423. 루드빅)

 

- 어쩌면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운명이(몸이 더럽혀진 소녀의 운명이) 나의 운명과 갊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자 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 둘은 서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를 비껴갈 수밖에 없었게지만, 우리의 삶은 둘 다 모두 유린의 역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나 결혼한 부부와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루치에가 육체적인 사랑을 유린당하고 그녀의 존재에 대하여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인생 또한 원래의 의지하고자 했던 가치들을 빼앗겨버렸다. 그것은 그 기워능로 돌아가서 보자면 아무 죄도 없는 결백한 것들이었다. 그렇다 결백한 가치들이었다. (p.425. 루드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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