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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친구삼아

작별 일기

by 비아(非我) 2019. 11. 18.

작별 일기

-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


- 최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19년판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에세이

쪽방촌 독거노인들을 돌보던 요양보호사이자 『할매의 탄생』, 『할배의 탄생』을 통해 가난한 노인들의 목소리를 기록해 온 저자가 삶의 끝자락에 다다른 여든여섯 치매 노모 곁에서 매일매일 써내려간 천 일간의 일기를 모았다. 저자는 돌봄노동자이자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에서 한 여성이 늙고 병들어 죽음으로 들어가는 기나긴 과정을 똑바로 바라보고 낱낱이 기록하면서, 그녀를 둘러싼 가족과 실버산업, 그리고 인간의 존엄까지도 냉정하게 되묻고 쪼개봄으로써 이 독특한 애도 일기를 완성해 냈다. 한 여성이 자신과는 상반된 삶을 살았던 엄마를 이해하고, 오랜 시간 불화했던 아버지와 서서히 거리를 좁혀 가며 상처를 치유해 가는 모습은 한 편의 성장소설을 읽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자신이 돌보던 가난한 노인들의 이야기, 엄마가 몸담은 실버타운 노인들의 삶, 그리고 가부장적 자본주의하에서 늙어죽어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밀한 상처와 치부를 노련한 필치로 담담히 써내려간 최현숙은 이 책을 통해 구술기록자가 아닌 작가로서 첫걸음을 내딛는다.


-------<교보문고 책소개>------------------------


이 책을 교보문고에서 몇시간을 서서 읽고(비가 내리는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서점에 앉아 책읽는 사람이 많았다.) 

돌아온 날 밤에는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자꾸 잠에서 깨었다.

우리 나이또래의 문제로 다가온 부모님들의 요양문제, 사별 등의 무게가 나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는 탓이다.

부모님들의 건강과 모습이 한 해 한해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저런 모습들이 나의 문제가 되겠구나...싶어 더욱 심란하다.

'내가 더이상 나임을 인삭하지 못할 때' 잠자듯 소리없이 죽고 싶다는 것이 간절한 기도제목으로 남을 밖에.

태어날 때는 선택하여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였으니, 죽을 때는 나의 선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식을 하고, 조용히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는 '존엄사'를 하루빨리 법적으로 인정해주면 좋겠다.

난 장기기증도 했으니, 여러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의미있는 죽음이 되지 않겠는가!

부모님은 부양해야 하고, 자식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낀 세대의 사람들은 특히 .

'늙어 요양원이나 가야지'했는데...그나마 경제적인 부담을 자식에게 지우지 않으려면, 얼마를 벌어두어야 하나?...

그러나 그런 삶이 국가경제적으로 옳바른 소비에 해당될까?...하는 의문이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으니, 이젠 나의 노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음...슬프다. 늙는 다는 것도 서러운데, 그 외로운 삶을 보다 경제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갑을 관계, 그 것을 만드는 '돈'의 유무.

나이듦 마저, 죽음 마저, ...


주변에 나를 숨쉬게하고,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도와주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지...매 순간순간 다짐하며.


<책 속으로>


- 실버타운은 그들만의 별세계다. 대체로 여성 노동자들의 육체적·감정적 노동이 그 세계를 돌아가게 하고, 그저 버스를 받는 입주자들은 상대적으로 남성 노인들이 많다(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실버타운이 아닌 보통의 요양원들은 여성 노인이 더 많다) 두고 온 세상과의 연은 가족으리 방문으로만 근근이 이어진다.

  나는 이런 그들만의 별세계에 공분하면서도, 기껏 움켜쥐었던 돈을 늙은 신체의 남은 품위를 연장하는 데 쓰고 있는 모습에서 욕망의 덧없음을 본다. 그 품위를 일찌감치 포기한 사람으로서 그 돈을 미리 번 착각이 들 지경이다. 사실 번 것은 돈이 아니라 그들과는 다른 우리들의 '생활'이다. '우리'라는 단어에 살맛 나게 사는 많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편 노쇠는 제정신 동안 껴입은 계급·계층의 껍질과 자국들을 한꺼풀 한 꺼풀 벗겨 낸다. 없이 산 노인들은 챙겨 입던 게 없으니 그때나 이때나 별 차이가 없다. 있는 노인들의 외관과 내면이 돈에도 불구하고 무너지는 걸 보며,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음을 만날지를 생각한다. 그들이 모르쇠한 다른 세상 사람들의 아픔과 힘겨움. 억울함, 천박함 속이 차라리 옳은 자리라고, 그래서 나도 함께 서고 싶은 자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본인의 엄마의 요양원 생활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이토록 거침없은 말을 뱉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난한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거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얼마나 분노할 말인가?...하지만 나도 이런 모습에 공감한다는 것은 나도 없는 사람들 편에 서 있기 때문일거다. ㅜ ㅜ)


- 나를 낳은 그녀도 외롭게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그녀 뱃속에서 나온 나도 외롭게 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내 안의 어린아이가 불쑥 올라와, 말 귀도 못 알아듣는 늙어 빠진 엄마를 붙잡고 혼자 울고 있었다.


- 모든 것을 효율의 타산에 넘긴 세상에서,  '셍명'이나'효' 등 지극히 사적이고 '턴부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영역에 대해서는 그토록 신봉하는 효율성의 기준조차 폐기한 채 돈을 지불하겠다는 부자 노인들과 자식들이 있고, 그들의 품위와 교양스러움과 연명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친절 노동을 끌어와 돈을 챙기는 실버산업과 의료 산업이 있다. 그 건너편 '다른 세상'에는 돈이 없어 고생하가 죽음으로 떠 밀리거나 죽음을 집어 드는 노인과 중장년, 청년과 청소년, 동반 자살 당하는 어린애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저 실버산업과 의료 산업에서 성실과 근면과 순종의 근로를 훈육받아 밥을 버는 노동자들과 그 자식들이다.

  가난한 노인들의 복지 현장에서 9년간 밥을 벌며 관찰해 온 내게, 그 거리는 너무도 까마득해 아예 다른 세상처럼 여져진다. '효'와 '하느님'이 '자본'과 만나 빈곤을 죄로 낙인찍고 있는 현장이다-


- 엄마는 지금 존엄한 존재인가? 모든 생명은 존엄한가? 그렇다면 족음은 존엄의 반대인가? 나는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무가치하다거나 반대로 존엄하다거나를 쉽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속임수를 더 캐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개인적으로는 분열적이더라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엄마의 위치와 관계를 가늠하는 일도 내던져 버릴 수 없다. 그 가늠이 무례하고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이라는 위험을 담고 있다 해도, 회피하지는 않겠다. 답을 얻지 못한다 해도 찾는 과정을 그만둘 수는 없다. 적어도 모든 생명은 존엄하다든가, 모든 죽음은 존엄의 반대라든가, 하지는 않다. 존엄이라는 단어는 너무 애매해서 쓰는 사람 멋대로 오용될 수 있다. 존업의 여부를 떠나 생명과 죽음은 연속이자. 이면이며, 순차이자 순환이다.


- 대부분의 어려움은 어느 순간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라 차차 다가오는 것이어서, 닥치는 대로 견뎌지다가/ 견딜 수밖에 없다가 문득 멈춰 되돌아 보면 지나온 길도 다가올 길도 까마득하기 일쑤다.


- 노인 하나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어 가는 가는 지극히 사적이면서 또한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 정치 안에는 계급과 젠더, 가족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들과, 사회복지, 과한 및 산업, 생명 윤리(그 과잉으로서의 생명 연장), 고령화, 효, 신앙 등 많은 사회문화적 요소들이 뒤엉켜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이런 항목들을 괴물처럼 빨아들여 사회 구성원 모두를 가해와 피해로 뒤엉키게 한다.


(책을 서점에서 서서 읽었기 때문에 메모를 할 수 없어 마음에 와 닿은 귀절을 사진을 찍었는데 페이지까지는 나오지 않아. 여기에 표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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