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글라스 케네디 장편소설
- 조동섭 번역
- 2011년판
내가 이 오래된 소설을 집어든 것은 그냥 머리를 식힐 무언가가 필요한 참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띄어서이다.
물론 더글라스 케네디의 다른 소설 <빅피처>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이 책 또한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집어들었을수도 있다.
아무튼
<빅피처>의 재미를 기대했던 나는 소설을 중반쯤 읽다가 '그만 읽을까?...'하고 던져 놓았다.
그러다 읽던 책은 언젠가 다시 읽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못된 버릇 때문에
도서관에 읽지 않고 반납하는 찝찝함을 털어내고자 나머지 반을 마저 읽었다.
그런데
중반부 부터는 그런대로 읽을만했다.
'소설속의 페트라'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부분부터.
이 소설은
통일 독일 이전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와 분단과 냉전으로 상징되는 비극의 역사가 서로 얽히며 펼쳐지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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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지금은 아니’가 ‘전혀’가 되기란 얼마나 순식간인가. 그러나 소포가 도착했고, 오랫동안 잊으려 애쓴 일이 다시 현실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과거가 더 이상 흐릿한 그림자이지 않을 때는? 그 과거와 더불어 살 수 있어야 한다. (p.20)
기억은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뜻밖의 소포가 도착하고, 과거가 한꺼번에 밀어닥친다. 추억과 그 부스러기들이 들쑥날쑥 떠오른다. 그러나 들쑥날쑥한 기억이란 애당초 없다. 그것이 기억에 대한 절대적인 진실이다. 추억과 그 부스러기들은 어떻게든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모두에는 사연이 깃드어 있다. 그 중 스스로 인정하는 사연 하나을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라 부른다.(p.33)
-우리가 순간을 붙잡지 못한다면 그 순간은 그저 ‘하나의 순간’에 불과할 뿐이야. 그런 인생은 단지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일 뿐이라 생각해, 주어진 생명이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뿐인 순간들의 합.(p.568)
어쨌든 인생은 선택이다. 우리는 늘 자신이 선택한 시나리오로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고, 앞으로 전진해야 하고,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아니,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길지 않은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뜻대로 완성해 가야 한다. 완성. 인생에서 ‘완성’ 될 수 있는 게 과연 있을까? 아니면 그저 잃어버린 것과 우연히 마주치는 게 인생의 전부일까? (p.590)
사랑은 늘 가장 중요한 발견이다. 계속 줄어드는 인생의 시간, 그 시간의 흐름을 줄이는 사랑이 없다면, 인생이라는 머나먼 여정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과련 어떻게 삶을 견딜 수 있을까.(p.591)
길이 있다. 새로운 날이 있다. 눈앞에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깨달음을 줄 심오한 무엇을 바라는 희망, 다시는 못 느낄 생각, 인생의 제2장으로 들어설 거라고 스스로를 타이를 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충동. 인간 실존의 중심에 있는 고독.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욕망. 타인과 연결될 때 피할 수 없는 두려움.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순간이 있다.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순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순간, 우리 앞에 놓인 순간,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얻을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는 순간.
우리는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까? 아주 짧은 찰나라도 순간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p.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