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테르 지음
- 염기용 옮김
- 범우 출판
- 2020년판
<깡디드〉는 우화소설로 작가의 사회, 정치, 철학 사상을 풀어쓴 작품이다. 낙천주의 철학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소년 깡디드는 오로지 그의 교훈대로 현실을 ‘최선의 세계’라 믿었지만 남작의 딸 뀌네공드를 사랑했기 때문에 독일 왕국의 작은 성에서 추방된다. 그 뒤로 포르투갈, 터키, 아메리카 여러 나라를 박해와 환멸과 곤욕 속에서 방황한다. 그 동안에 만난 숱한 인물로부터 인간의 교활함과 우매함을 체득한 깡디드는, 낙천주의만이 이 세상을 통찰하는 철학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볼떼르는 이 작품에서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와 신학적 목적론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출판사 책소개------------------------------------------
이 책 〈깡디드〉는 그의 사회 · 정치 · 철학 · 사상을 풀어쓴 소설이다. 평론가 브레통은 18세기를 휩쓴 프랑스의 사상 소설 가운데 하나만 내세운다면 서슴없이 이 소설을 들겠노라고 했고, 훨씬 뒤인 20세기의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앙드레 지드 같은 작가도 “만 권의 세계문학 가운데서 만약 전쟁으로 책 열 권밖에 가질 수 없다면, 바이블과 셰익스피어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볼떼르의 〈깡디드〉를 빠트리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토록 잘 알려진 이 작품은 볼떼르의 시작(詩作)이나 극작을 포함한 많은 저서 가운데 예술적 가치가 높고 생명이 긴 소설로, 사상적 경향이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볼떼르는 그의 사상을 대중에게 쉽게 전하려면 먼저 그 장르에 있어 소설이 가장 합당하리라는 생각에서 75세 이후에도 계속 소설을 썼다.
〈깡디드〉는 당시의 사회가 지닌 뿌리 깊은 병폐와 종교에의 맹신을 철저히 부정하고, 인간 스스로가 이성에 호소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주제로 삼았다.
----------------(출판사 서평 중에서)-------------------
소설 <43321>을 읽고 있는데, 이 <깡디드>책을 주인공이 극찬하는 것을 보고
'이런 소설도 있었나?'하면서 찾아 본 소설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테르를 10대 청소년기에 읽는 것에 비해 우린 입시에 매달려 세계 명작 축약본을 본다.
유럽에서는 철학을 고등학교에서 이미 다루는 반면, 우린 대학생이 되어서도 철학은 전공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삶의 의미와 방향, 그리고 가치관을 형성해 나갈 당시에 고민에 대해 답을 주는 철학에 대한 외면은
어쩜 무의미하고, 사회속에서 경제적 이득만 따지는 현대인을 양성하는 어른을 만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린 많은 부분에서 미국교육을 모방하고,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하고 있지만
제도적 모순 속에서 장점은 버리고, 단점만 따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앋.
미국은 소득의 격차가 양극화되어 상류층의 교육과 보편적인 국립교육과는 다르다. 우린 어느쪽에 가까운지는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교육이 보편화된 보통교육이어야 함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 속에서 참된 인간성을 가진 미래인재를 양성하는 것에 중점이 되어야 한다.
그 목표를 일어버린 교육은 입시경재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딛고 일어서는 경쟁주의적 인간을 만들 뿐이다.
모든 것은 미국교육제도를 따라 하면서, 입시와 경쟁은 중국,일본 등과 같아 많은 폐단을 낳고 있다.
<깡디드>를 이야기 하면서 정말 엉뚱한 방향의 생각을 적었다.
아무튼 가정교사로부터 '모든 것은 선이다'는 라이프니치의 사상을 교육받고, 착하기만 한 깡디드(깡디드는 '단순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가 세상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자신의 철학이 맞지 않음을 깨닫고, '모든 것은 신의 뜻'이고, '신의 섭리'라고 생각했던 세계에서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 풍자소설은
우리가 청소년기에 혹은 늦으면 20대에 늘 매달려 고민했던 주제와 겹친다.
그런 주제를 이제 다 늦은 나이에 접하다니...안타까운 일이다.
이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착하기만 하면서 이지저리 당하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전란과 분쟁에 휩싸인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모습이, 엉뚱하지만 정의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돈키호테와 비슷하다.
이 책의 원제목은 <깡디드냐 낙천주의자냐>이다. "볼테르는 라이프니츠의 '단자이론'은 부정했지만 '충족 이유율 이론'은 수용했다 (...) 그가 풍자한 것은 서술용어 였다. 즉 철학이 아니라 그 철학안에 내포된, 삶을 메마르게 하는 요소 (서평 /웨이드의 평론,<볼떼르와 깡디드> p.188) - 종교재판, 불의, 좀도둑, 강간, 예수회, 노례제, 질병 등등-를 비판하고 있다"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고, 모든 것이 신의 섭리라는 것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것은 용기에 해당한다.
현재 볼테르가 깡디드를 통해 우리에게 던진 질문
- 이런 세상에서 모든 것이 선을 향해 간다고 믿을 수 있을까?
- 모든 악과 선은 신의 섭리안에 있으니, 우린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낙천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 우린 어지러운 세상에 '체념'하며 살것인가? 아니면 '반항'하며 살것인가?
-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많은 '악'들이 정말 신의 뜻일까?
- 신이 선이라면 세상의 '악'은 왜 존재하는가"- 어지러운 세상에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는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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